2014. 3. 19 [세계일보] 영해 춘계학술대회
작성자 : 동학학회 등록일시 : 2014-04-03 오후 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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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3월 영해 병풍바위에서… 조선판 민주화운동 시작되다 ‘영해 동학혁명’ 학술대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뢰한 수백명이 머리에 갓을 쓰고 손에 죽창과 조총을 들고 갑자기 영해부에 들어와 군기를 뺏고 관사에 불을 질렀다. (관군은) 세가 불리하여 이를 상대할 수 없었다. 사또는 목이 찔려서 죽고 관인이 떼였다.” 1871년 음력 3월10일, 경북의 영해부(영덕군)에서 발생한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인근 ‘병풍바위’에 집결한 동학교도 수백명이 일으킨 봉기였다. 하루가 안돼 사건은 마무리됐지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지방관 살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 참여 등은 20여년 후 ‘동학농민혁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양심의 자유를 요구했다는 점 등에서 동학혁명의 ‘근대성’을 일찌감치 드러내기도 했다. 동학학회는 동학혁명 120주년을 맞아 ‘동학혁명의 시발점, 1871년 3월 영해 동학혁명’이란 주제로 27일 경북 영덕의 영해 예주문화예술회관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동학농민혁명을 예고하다영해 동학혁명은 20년도 넘게 지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봉건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항해 발생했던 여러 민란 중의 하나이면서 그와는 다른 특징을 보였기 때문이다. 경희대 임형진 교수는 지역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영해 동학농민의 난은 무려 16개 지역 민중들이 참여했고, 이후의 행적을 보면 영해 지방에 국한된 거사가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민란에서 발견되지 않은 지방관 처형은 “획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아무리 탐관오리라도 임금을 대신한 수령을 죽인다는 것은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반란으로 볼 수 있었다”며 “(영해부사 이정을 죽인 것은) 주도세력이 조선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을 확정하는 것이다. 그들만의 이상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동학혁명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고 밝혔다. 또 ‘제세안민’(濟世安民·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의 구호를 내세운 것을 ‘조선판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며 “최초로 동학이라는 사상적 민중운동이었다”고 설명했다. 숙명여대 임상욱 교수는 영해 동학혁명이 1863년 죽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려고 했다는 점에서 종교·양심의 자유를 표방했다고 분석했다. 최제우는 1863년 10월 평등사회의 구현을 제창했고, 이듬해 3월 사형당했다. 임 교수는 “근대성은 개인 양심의 자유로서 다양한 형태의 종교가 출현하는 것을 허용한다”며 “(영해 동학혁명이) 처음 요구했던 것은 신원 즉 좁게는 종교의 자유, 넓게는 양심의 자유였으며, 이는 매우 의미 있는 근대적 시민운동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필제·최시형을 어떻게 볼 것인가영해 동학혁명의 중심에는 이필제와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있었다. 이필제에 대한 평가, 당시 두 사람의 관계설정에 대해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1825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필제는 영해 동학혁명 전에 진천작변(1869년), 1870년(진주작변)을 주도했다. 영해 동학혁명 이후 조령작변(1871년)의 주동자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직업 봉기꾼’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의 이력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중국 대륙의 주인을 우리 민족으로 보는 독특한 논리다. “중원의 원래 주인을 단군으로 주장하며, 단군의 맥이 한나라, 명나라, 그리고 이필제 자신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펼쳤다. 임형진 교수는 “19세기 중반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던 생각이었다. 모화사상에 젖어 소중화를 외치는 지배층에 대한 각성을 주는 진취적 기상의 인물이었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동학 측의 자료에는 이필제에 대해 “광인처럼 혈안이 되어 날뛴 사람”이라는 평가가 등장한다. 또 자신을 지지해줄 독자적인 기반도 갖추지 못한 그가 지방관, 조선의 왕도 아닌 중국의 천자가 되겠다고 한 것은 “정신질환에 가까워 보인다”는 분석도 있다. 영해 동학혁명의 또 다른 주동자인 최시형의 적극성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임상욱 교수는 “온건한 평화주의자로 정평이 난 최시형이 동학 최초의 무력이 동반된 민중 봉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은 뚜렷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며 “최시형이 2대 종주이긴 했으나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한 것이 (영해 동학혁명이 일어난 뒤인) 1885년 이후고, 영해 봉기에서 이필제를 따르는 세력이 훨씬 강력했기 때문에 봉기 참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 세계일보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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