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SSN: 1598-7566 / eISSN: 2713-3605

동학학보, Vol.58 (2021)
pp.43~78

DOI : 10.46639/kjds.2021.58.2

독립유공자 삼혁당(三革堂) 김영원(金榮遠)의 생애와 천도교의 교육 운동

김철배

(임실군청 학예사(문학박사))

이 연구는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8월에 옥중에서 순국한 삼혁당 김영원의 생애 및 천도교 활동을 조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우선 1973년부터 1981년까지 2차례 필사된 『천도교 임실교사』를 활용하여 임실지역 동학의 전래로부터 천도교 활동에 대해 검토하였다. 김영원의 생애 및 그의 활동을 조명하기 위하여 김영원의 증손자 김창식 임실교구장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문서(家藏文書) 약 340여 건을 조사하였고, 이 중에서 김영원과 관련된 조선시대 고문서, 동학 임명장, 천도교 임명장 및 삼화학교와 교리강습소 증서 등 약 73건을 분석하여 삼혁당 김영원의 행적을 밝혀 서술하였다. 삼혁당 김영원은 26세에 무성서원 장의, 색장, 사직대제 제관 등을 역임하였고 1882년 삼요정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00년 임실군수로부터 운암면 훈장에 차정되는 등 유림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유림으로 활동한 그는 21세 때인 1873년에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동학을 접하였고, 1889년 동학에 정식으로 입교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접주로서 참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로 1906년 천도교 교육기관인 삼화학교(三和學校), 창동학교(昌東學校) 교장으로서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14년 천도교 임실교구장에 임명되어 천도교를 이끌었다. 그러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어 그해 8월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접주로 참여하였던 김영원은 1919년 3.1독립운동의 지도자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영원의 행적을 통해 동학농민혁명과 3.1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족운동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근대 의병활동이나 3.1 독립운동으로 추서된 독립유공자의 경우, 개인문집이나 진중일기 등이 남아있지 않으면 대개 일본강점기 판결문에 의존하여 연구되는데, 독립유공자의 후손에 대한 적극적인 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구체적 생애를 조명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The Lifetime of Kim Yeong-won, Independence Patriots, and his Cheondogyo educational activities

Chulbae Kim

This study casts light on the life and religious activity of Kim Yeong-won, an independence patriot and arrested for March 1st Movement, and died in prison in August, 1919. First of all, I study the book, Cheondogyo Imsilgyosathat transcribed from 1973 to 1981, and understand the introduction of Donghak and the activity of Cheondogyo in Imsil roughly. Second, I examine about 340 documents owned by Kim Chang-sik, a parish priest of Imsil and great-grandson of him, in order to look into his life and activity. Finally, I write his track by selecting and analyzing 72 documents among these. He was born in 1853, devoted himself to his home studies for Gwageo, the highest-level state examination. He was appointed to Domaesaekjang(道內色掌) and Donaejangui(道內掌議) of Museong Seowon in 1878 and 1879, to a priest of Sajikdaeje(社稷大祭) in 1879. According to testimony of his descendants, he retired in 1882, went down to his hometown, built Samyokjeong(三樂亭) in Si-mok Dong for training younger students, and worked as Confucian scholar in a local community. In the meantime, he came into contact with Donghak by Choi Si-hyeong in 1873, and joined in earnest a faith community in 1889. So in 1894, the outbreak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he participated as Jeopju. After revolution, he made an affort at the national education as an principal of Samhwa School(三和學校) and Changdong School(昌東學校) in 1906. In 1914, being a parish priest of Imsil, he was dead in prison in 1919. I think that his activity of Jeopju in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a leader in March 1st Movement is an important key to find out a continuity between Donghak and Cheondogyo and a historical meaning of the Movement. This study is very meaningful that it discovers his track concretely through an investigation about his descendants and an excavation of materials, and checks a continuity from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 March 1st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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